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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난
#가오슝
불현듯 시작된 여행이었다.
사실 지난번 가오슝 여행이후 대만은 너무 익숙해져있다고 생각해서 당분간 여행을 자제할 생각이었는데 평소처럼 오던 땡처리여행 안내에 들어있는 가오슝 항공권이 눈에 들어왔다. 안내메일엔 12만원으로 되어있었던 것 같은데 클릭해서 확인한 실제 가격은 13만2천원이었다. 그래도 평소 다니던 대만 항공권을 생각하면 너무나 싼 가격이었기에 따로 빈좌석이 보이진 않았지만 주말끼고 3박4일 항공권에 무작정 대기를 걸었다. 업무적으로 수월함이 없는 고단한 날들도 영향을 주었겠지만 최근 주변에서 대만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사람이 있어서 더 구미에 맞게 느껴졌던 것 같기도 하다.
늦은 밤이었지만 아내에게 이런 항공권이 떴는데 대기라고 하니 나 혼자 걸어볼까? 물어봤더니 언제나처럼 "그럼 가봐" 하고 편하게 대꾸해준다. 살짝 미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한동안 혼자 여행 가본적이 없었기때문에 일단 대기를 걸어보기로 했다.
다음날 아침 몇시까지 결제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예약이 취소되며 결제 후에는 취소불가라는 안내 문자가 도착했다. 다시금 일정에 문제가 없는 지 확인해 보고 급하지 않은 회의는 일정을 조정하기로 하고 비용을 결제했다. 왠지 학창시절 담타넘고 땡땡이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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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날
여행전날은 항상 밤샘이다.
게으른 탓인지 항상 일이 밀려있기도 하고 여행기간을 마음 편히 보내기 위해 며칠간 업무연락을 받지않도록 미리미리 업무를 챙겨둬야한다.
이른 아침 비행기라 밀린 새벽에 업무메일들 보내기도 하고 책도 읽다가 공항행 버스에 올랐다
새벽 시간이라 여행객보다는 공항 근무자들로 가득한 버스를 타고 안개가 짙은 동네를 떠났다
모처럼 혼자떠나는 여행이고 일정도 짧으니 가볍게 움직이려고 배낭을 맺는데 괜히 젊어진 기분이다. 티켓팅을 끝내고 검색대를 지나 도착한 24시간 영업 라운지는 청소시간이라 30분 기다려야 했지만 저가항공이니 부지런히 든든하게 먹어둔다
맥주 두잔과 와인 한잔 비행기에서 푹 잘 요량으로 마신 술이지만 밤샘의 피로탓인지 기절하듯 잠들어 버렸다
항상 긴장하던 이륙순간도 못 느낀체 자리에 앉자마자 골아떨어졌다 비행기가 목적지 공항에 도착해 바퀴가 닿는 진동에 잠이 깼는데 목이 칼칼한걸보니 코도 좀 심하게 골은 것 같다. 괜시리 불운한 옆자리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비행기를 벗어나자마자 열기가 느껴진다.
11월초면 아직 뜨거울 곳이었다. 한낮의 기온이 28도 내외를 왔다갔다했으니 이번 여름에 느끼지 못한 더위를 대신해서 즐기다 온 것 같다.
입국장을 벗어나자 마자 하나밖에 없는 은행에서 환전을 하고 72시간짜리 유심칩을 사서 휴대폰에 끼우고 언제가 사용할 요량으로 대만관광청 행사때 받아둔 이지카드를 꺼내 교통카드를 들고다니던 지갑에 교통카드와 교체해 장착하고 나니 여행의 긴장감따윈 눈녹듯이 사라진다.
몇번째의 대만여행인지 세어보려다가 이번에 가오슝 국제공항이 대만에 있는 4개의 국제공항 중에서 내가 가보지 못한 유일한 국제공항이라는 것에 여행의 의미를 두기로 했던 것이 떠올랐다.
뭐 아무렴 어떤가 그냥 이곳이 좋고 지난 여행때 느꼈던 익숙함때문에 당분간 더 방문을 자제하고자 했던 마음은 이미 도착한 시점에선 역시 익숙한 곳이 좋아라는 마음으로 간사하게 바뀌어있었다.
가오슝 공항은 시내와 MRT로 가깝게 연결되어있었다. MRT를 타고 가오슝메인역으로 가서 타이난행 국철로 갈아타고 이동하기로 했다.
천천히 이동해도 1~2시 전에는 타이난 숙소까지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가오슝역에 내려 국철 게이트로 이동하며 철도도시락 하나를 구입했다. 평소라면 동파육이나 지파이를 선택했겠지만 남쪽 그것도 유명한 항구도시라는 이유만으로 자세히 살펴보지 않고 해산물을 선택했는데 장어였다. 여행도 전에 피로감이 몰려왔던 비행시간을 떠올리며 오후를 힘차게 보내봐야겠다고 다짐하며 열차에 올라타자마자 도시락을 까먹고 스도쿠에 빠져들었다.
모든 역을 일일이 다 거치는 노선을 탑승한 탓에 시간이 좀 오래걸리긴 했지만 열차시간표를 꼼꼼히 살피는 번거러움보다는 운에 맞기는 여유로움을 택하고 싶었다.
타이난역에 내려 출구를 빠져나오자마자 여행정보센터가 보인다.
숙소까지 거리도 물어볼겸 뭐 볼게있나 들어가보았다. 습관적으로 관광안내 책자들을 훑으며 중국어 자료를 꺼내드니 중국어로 말을 건다. 한국인이라고 하니 한국어 자료가 없어 영어자료를 찾아준다고 한다. 어차피 영어가 짧기도 하고 영어보단 한문이 읽기가 편해 한문(한쓰라고 발음한다)을 읽을 줄 안다고 그냥 중국어자료를 가져가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숙소까지 거리를 물었더니 숙소까지의 거리는 걸어간다면 대략 20분정도 거리라고 알려준다.
아마도 이 여행정보센터에는 사람이 자주 찾지 않는 모양이다. 인상좋은 중년여성 두분은 유일한 방문자인 나에게 끊임없이 관심을 가지고 말을 걸어준다. 몸이 피곤한 것도 있지만 서툰 영어 몇마디 나누다 보니 인내심과 집중력이 모두 바닥나 버렸다. 열차안에서 스도쿠가 지겨워 꺼내 읽던 책이 '오늘시작'이라는 시작문에 대한 책이었는데 한글로 된 책을 보고 어떤 책이냐고 묻길래 그냥 시집이라고 했더니 날보고 시인같다고 한다. 수염을 깎지 않아서 였을까? 어이없어 하는 내 모습에 상황을 수습한다고 하는 말이 잘생겨서 시인이라고 했다는 둥 한국 사람(남자?)는 대체로 잘생겼다는 둥 아무래도 한류팬인지도 모르겠다. 서로 더 민망하지 않기 위해 뒤이어 나오는 말에 귀를 닫고 서둘러 센터를 나와 숙소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날은 더웠지만 기분은 시원했다.
언제나 느끼는 걷기에 불편한 대만의 도로를 따라 지도만 보고 걸어가다 보니 일본의 위안부 징용을 고발하는 동상이 보인다. 대만은 일본의 첫번째 식민지였다. 여기저기 그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지만 우리보다는 일본에 대한 거부감이 적고 오히려 일본을 좋아한다고 느껴지는 경우가 많지만 다니다보면 아픔이 느껴지는 장면들을 어렵지 않게 만나기도 한다.
꽤 오래전 보았던 시디크 원주민들의 일본에 대한 항쟁을 다룬 영화 <시디크 발레>는 식민지화되어가며 겪어야 했던 그들의 고단함과 꺽일 수 없는 의지를 잘 보여준 영화여서 영화를 본 이후엔 좀더 대만 원주민들에게 관심이 가게 되는 것 같다.
타이난 시립박물관을 지나 예약한 숙소에 도착했다. 혼자만의 여행이라 저렴한 도미토리를 이용할 생각으로 예약한 곳인데 호텔과 호스텔을 겸하는 곳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트랜디한 숙소여서 가성비 좋은 숙소를 잘 골랐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항상 문제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발생한다. 언제나 카메라 가방에 넣어 다니던 110V 변환 소켓이 없다. USB 멀티포트가 있어도 충전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익숙한 곳이라는 생각에 무엇이 필요한지 꼼꼼히 챙기지 못한 탓이었다. 나는 그저 대만이 익숙하게 느껴진 서툰 여행자일 뿐이었다.
숙소에 짐을 맡기고 가벼운 차림으로 나서며 배터리를 체크해보니 용량이 크지 않아도 보조 배터리도 하나 있어서 당장은 버틸 수 있을 것이라 생각이 들었다. 전날 밤샘으로 지쳐있었기때문에 오늘은 일단 숙소 근처로만 움직이자는 생각에 구글맵과 지도를 펼쳐보았다.
가까운 곳에 시립미술관과 공자묘가 보인다. 들어오면서 보았던 시립미술관 건물은 별관이었고 공자묘 앞에 미술관 본관이 있다고 해서 겸사겸사 공자묘로 발걸음을 향했다. 타이난 공자묘는 대만 최초의 공자묘 사당이다. 유교의 발상지였던 중국문화권에선 공자묘는 중요한 문화재로 인식되고 있고 대만을 갈때마다 공자묘가 우리의 교회나 절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고 있었다.
비행기에서 내내 잤었음에도 몸이 무거운지 발걸음이 가볍지 않다. 겨우 2키로 정도 걸었을 뿐인데 힘이 든다. 시립미술관 본관에 들어가니 입장료를 따로 받고 있어서 매표소 앞 의자에 잠시 앉아 쉬다가 공자묘로 발길을 돌렸다. 딱히 돈내고 볼 만큼 관심이 가는 전시포스터는 아니었다.
공자묘를 가볍게 훑고 예전 일제시대 법원 건물을 지나 블루문화창의지구라는 곳까지 걸어갔다. 요즘 우리나라에도 곳곳에 조성되는 사진찍기 좋은 창작지역인데 크지 않아도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져 있었다. 근데 카메라를 들고 있긴했지만 셔터에 손이 가진 않는다. 공간보다는 인물을 찍기 좋아하는데 딱히 모델이 함께 간 것도 아니고 몸도 피곤하니 카메라도 그냥 짐처럼 느껴진다.
아무래도 더 걷다가는 쓰러질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문화창의지구 한쪽켠에 있던 인디고블루 천연염색 가게의 이층에 있는 카페로 올라가 스트로베리소다 한잔으로 더위와 피로를 식혀본다.
이층 창가에서 내려다보는 거리의 풍경이 마음에 들어 텅빈 이층에 혼자 해꼬리가 길어질때까지 앉아있었다. 마음에 드는 곳이다. 다음엔 누군가 함께 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막상 다음 갈곳을 정하지 못한체 숙소로 일단 돌아가려고 생각했는데 아내가 유일하게 부탁한 우산가게 주소를 찍어보니 멀지 않은 곳이어서 약간 돌아가더라도 들려서 가기로 했다.
더위때문인지 피곤함때문인지 입맛도 없어서 배가 약간 고프긴 했지만 음식점 앞에서 망설이다가 계속 지나치고 있었는데 길거리 음식으로 파는 튀김이 갑자기 눈에 들어왔다. 내용물이 무엇인지도 모른체 그냥 하나 달라고 해 싸들고 우산가게로 찾아갔다. 여행지 그것도 4~5일정도의 짧은 여행에서 무엇인가 사야할 경우 길게 고민하지 않는 버릇을 들여왔다. 여행기간이 짧으면 한번 지나간 곳을 다시 지나기 쉽지 않기때문이고 가격비교로 여행시간을 손해보는 것이 더 낭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근데 뭐 이 가게는 그런 고민조차 할 필요 없이 들고다니는 무게만 고민해야 할 정도로 저렴한 가격에 우산을 팔고 있었다.
대만은 비가 자주 오는 곳이라 우산이 튼튼하고 다양한 종류의 우산을 판매하는 곳이어서 선물용으로나 기념품으로 우산을 챙겨오곤 했는데 몇년전 대만여행에서 구매한 우산을 잃어버린 탓에 이번 여행에 필수 미션으로 장착되었다.
아이와 집에서 쓸 접이용 우산을 몇개 골랐더니 가방이 묵직해졌다. 더이상 돌아다니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인근에 있는 하천과 다리의 존재가 나를 끌고 간다. 다리를 건너니 편의점이 하나 있길래 맥주한캔을 사들고 좀전에 산 튀김과 함께 강변에서의 시간을 보냈다.
고요한 강물에 물드는 석양을 바라보는 것은 언제나 편안함을 느끼게 해준다.
숙소로 돌아가 좀 씻고 야시장이나 나가보겠다는 생각으로 숙소로 들어가 가방을 챙겨 배정받은 이층침대로 올라가니 갑자기 피로가 몰려오며 손가락하나 움직이기도 귀찮아진다. 겨우 양말과 바지를 벗고나니 아차 사물함에 넣은 가방에서 꺼낼 것이 있는데 너무 귀찮네 하는 생각에 벌렁 누웠는데 그 뒤으로 바로 기절해 버렸다. 여행 전날까지 밤샘을 한 탓이었겠지만 점점 여행지에서의 첫날에 부지런함이 사라지고 있다. 체력적으로 첫날엔 여행을 위한 휴식을 취하는 것이 여행에서 더 효율적이라고 느끼는 순간들이 반복되고 있다.
부산한 소리와 낯선 기운에 눈을 떠보니 다음날 아침이었다. 아마도 12시간은 잠이 들었나 보다. 여행지였지만 야시장보다 중요한 단잠을 이루었다는 것에 안도했다.
'신.천.지.를 찾아서 > 타이난 - 대만의 흔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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